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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뉴스1) 이상휼 기자 = "비가 종일토록 쏟아지는데 백록담이 모습을 보여주네."
잔뜩 흐려서 달리는 내내 비가 왔지만 거짓말처럼 백록담은 청초한 모습을 드러냈다.
코스의 절반, 달린 지 50㎞ 구간에서 만난 백록담은 트레일러너들에게 기쁨의 탄성을 지르게 했다. 백록담 너머로 구름 사이에 푸른 바다의 윤곽도 보였다.
지난 19~21일 사흘간 제주도 서귀포시 일대에서 국제트레일러닝대회인 '2025 트랜스 제상장종목
주 by UTMB'가 열렸다. 트랜스 제주는 2023년 세계적 울트라 트레일 러닝대회인 UTMB(Ultra-Trail du Mont-Blanc) 월드시리즈에 국내 최초로 가입한 국내 최대 규모 트레일러닝 축제다.
올해는 44개국, 49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코스는 155㎞(100마일), 104㎞, 70㎞, 20㎞ 등 4종목으로 진바다이야기 공략법
행됐다. 경기가 열리는 동안 100k 종목은 UTMB 홈페이지 등에서 실시간 라이브 방송으로 중계했고, 이 방송을 통해 모든 참가자들의 실시간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서비스 제공해 호평을 받았다.
기자는 지난 4월 26일 열린 '블랙야크 트레일런 제주(57㎞)'에 참가하면서 트레일러닝에 입문했다. 그 후 몇 번의 트런 대회 참여를 거쳐 1대상 주식
00k 종목에 첫 도전했다.
어쩌다 산길을 달리게 됐냐면, 거듭된 술자리로 인해 체중이 급격히 불어 건강에 좋지 않은 신호가 느껴졌다. 평소 가끔 하던 등산과 러닝에 시간을 더 투자했고, 등산과 걷기와 러닝을 합쳐 놓은 트레일러닝으로 흘러들었다.



지난 제주은행 주식
18일 오후 3시 20분께 트랜스제주 100k 대회의 주무대인 한라산 정상 일대를 달리는 참가자들. 2025.10.18/뉴스1 ⓒ News1 이상휼 기자


20일 오전 5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서귀포시 제주월드컵경기장에 모인 '트랜스제주 100㎞' 종목 출전 주자들이 일제히 저마다의 휴대폰과 촬영무료충전야마토
장비를 들고 출발 순간을 기록했다.
'트제 100k'는 한라산을 두 번 오르고 또 한라산 둘레길을 돌아 원점으로 복귀하는 코스다. 새벽 어스름녘 '치유의 숲'을 가로지르고 영실로 올라 윗세오름을 거쳐 어리목으로 하산한 뒤 관음사탐방로까지 내리막길을 달렸다. 그 끝에서 만난 체크포인트(CP)4는 오아시스였다. CP는 주자들에게 응원과 함께 음료·간식을 제공해주는 곳이다.
CP4에서는 방수재킷과 서바이벌 블랭킷, 헤드랜턴과 휴대폰 등 필수장비 검사를 거친 뒤 컵라면과 간식·음료를 보급해줬다. 컵라면 두 사발에 밥과 김치를 말아 물을 받아놓고, 드롭백에 맡겼던 배낭을 찾아 젖은 신발과 양말을 갈아신었다.



트랜스제주 100k 체크포인트 네번째 구간서 제공된 사발면. 기자는 두 사발을 허겁지겁 들이켰다. 2025.10.18/뉴스1 ⓒ News1 이상휼 기자


다만 드롭백 CP 치고는 매우 협소하고 식탁과 좌석이 부족해 기자를 비롯한 다수 주자들이 젖은 바닥에 앉아 허기를 채워야 했다. 빗물에 말아먹는 사발면이었지만 꿀맛이었다. 로드러닝이나 등산할 때에 비해 트레일러닝은 더 많은 음식을 필요로 한다. '카보 로딩(장거리 달리기 전 탄수화물 저장량 극대화)'은 트레일러너에게 필수다.
관음사탐방로는 이달 말까지 백록담 등반이 불가능하지만 이번 대회 주자들에겐 예외가 주어졌다. 관음사 계단지옥에 악전고투했고 삼각봉대피소 데크에 누워 10여 분 단잠을 청했다. 조금 더 오르자 왕관릉이 위용을 드러냈고 바람이 거세졌다.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였는데 백록담은 또렷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판악으로 하산을 완료하자 CP5. 절반을 넘어 60㎞를 돌파했다. 처음 경험하는 장거리였다. 완주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레이스맵에 따르면 한라산 이후 내리막이 이어진다. 막연하게 '한라산을 내려오면 피니쉬까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후반 구간은 예상보다 험했다. 서귀포의 지하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도로 아래 굴다리로 내려가기 일쑤였고 비에 젖은 주로는 온통 진흙뻘이었다. 제주 화산석, 무수한 돌들은 어둠과 함께 더욱 난코스로 둔갑했다. 큰 돌과 돌 사이를 건너다가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 뒤따르던 외국인 선수가 괜찮냐고 물으며 손을 내밀었다.
야간 트레일러닝은 정신력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주로가 긴 만큼 주자들의 간격도 점차 멀어진다. 출발할 때 그 많던 주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약해진 헤드랜턴 불빛에 의존하며 혼자 '뛰걷뛰걷'하고 있으면 온갖 잡념이 엄습한다.



트랜스제주 100k 대회를 완주허고서 엉망이 된 기자의 신발. 2025.10.19/뉴스1 ⓒ News1 이상휼 기자


가장 중요한 동반자인 시계 속 GPX와 주로 30m쯤마다 설치된 야광표식은 문제 없음에도, 주변에 주자들이 없으면 길을 잘못 든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한눈 팔거나 정신이 산만해지면 여지 없이 돌부리에 걸리거나 진흙길에 미끄러진다.
트랜스제주 100k 경기의 제한시간은 29시간. 100k에 937명의 트레일러너가 도전했고 이중 102명은 DNF(Did Not Finish), 835명이 완주해냈다.
기자는 21시간52분께 결승선을 통과했다. 107.7㎞, 누적고도 4369m로 측정됐다. 전체 384위, 성별 327위, 연령대(40~44세) 중에서는 64위였다. 완주할 것, 그리고 '만 하루를 넘기지는 않겠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자원봉사자들이 건네준 어묵탕으로 몸을 녹였다. 하체의 근육통이 시작됐다. 숙소까진 1.5㎞ 남짓해 멀지 않았지만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는 "야밤에 무슨 이런 체육대회가 다 있냐"고 물었다. 서귀포시는 이번 대회로 선수와 가족·지인 등 6000명 이상이 제주를 찾아 지역 경제 파급 효과가 170억 원에 달했다고 밝혔다.
세계적 대회답게 외국인 참가자도 많았다. 주로에서 아시아·유럽의 트레일러너들과 '이 길인가?', '랜턴 불빛이 너무 약해 위험해',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느냐'는 등 짧은 대화를 나눴다. 사이타마에서 왔다는 일본인 주자는 기자가 '알바(정해진 코스를 벗어나는 상황)'를 할 뻔했을 때 불러 세워 길을 바로잡아줬다.



트랜스제주 100k 대회 70km 구간부터 결승선까지 함께 달린 양종찬 변호사와 홍콩 선수 글로리아 씨. 2025.10.19/뉴스1 ⓒ News1 (사진=양종찬 씨 제공)


이번 대회 100k에 출전한 홍콩인 글로리아 씨는 70㎞ 구간에서 양종찬 씨(39·법무법인 청신파트너스 변호사)를 만나 서로 격려하면서 함께 달렸다. 어두운 30㎞ 주로를 페이스메이킹한 양 씨는 경기장에 다다르자 글로리아 씨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양보했고, 글로리아 씨는 뒤돌아보며 "함께 끝내자"며 화답했다. 두 사람의 기록은 20시간, 20시간1분. 다음 날엔 제주의 토속음식을 함께하며 우정을 이어갔다.
지난달 극악의 난이도로 악명 높은 장수트레일레이스 100k(누적고도 6095m)를 완주하면서 23위라는 성적을 달성한 정민교 씨(39·삼성디스플레이 재직)는 “우천으로 인해 코스가 극도로 험난했고, 진흙과 돌길이 이어지는 역대급 난코스였다”며 “그럼에도 백록담 구간에서는 비가 멈춰, 잠시나마 장엄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 씨는 이번 대회가 단순한 고도 수치 이상의 고난이었다고 회상했다. “누적 고도는 숫자에 불과했다. 예상치 못한 비, 젖은 돌길 등 환경적 변수들이 끝까지 이어졌고 각 CP에서는 에너지를 보충할 음식이 거의 없었다. 이온 음료조차 없는 구간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트랜스제주 100k 대회를 함께 달린 직장인 트레일러너 양종찬, 권용균, 정민교 씨. 2025.10.20/뉴스1 ⓒ News1 (사진=양종찬 씨)


인천에서 온 권용균 씨(29·삼성바이오로직스 재직)는 "집에 있을 걸…새벽 3시에 혼자 헤드랜턴 차고 산속에 있는데 '이게 뭐지' 하는 현타가 왔다"면서도 "정말 이상한 운동이다. 시간이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 오히려 미화된다"고 했다.
기자는 약 22시간을 뛰는 동안 준비해갔던 에너지바·에너지젤·사탕·소시지·육포·젤리를 다 먹어치웠다. 노후자동차와 아재트레일러너의 연비는 닮았다. 기념품으로 받은 '100k 완주자 재킷'은 평생 소장품이 됐다. 이 재킷을 입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리라.



지난 18일 오후 3시 17분께 트랜스제주 100k 대회의 주무대인 한라산 최정상 백록담 풍경. 멀리 구름 사이로 바다도 보인다. 2025.10.18/뉴스1 ⓒ News1 이상휼 기자


daidaloz@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