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버킷리스트와 성적 자신감을 위한 레비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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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살신강 작성일26-01-30 15:58 조회2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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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버킷리스트와 성적 자신감을 위한 레비트라
연애는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이며, 두 사람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애의 의미는 점차 깊어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애정도 한층 더 강해지지만, 때로는 일상적인 문제들로 인해 관계에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연애의 버킷리스트는 두 사람 사이의 특별한 순간을 더욱 풍성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연인과 함께 꼭 해봐야 할 연애 버킷리스트와, 그 안에서 성적 자신감을 되찾기 위한 레비트라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연애 버킷리스트의 의미
1 연애 버킷리스트란 무엇인가?
연애 버킷리스트는 두 사람이 함께 이루고 싶은 목표와 꿈을 나열한 목록입니다. 이 리스트는 여행, 특별한 데이트, 또는 새로운 경험을 시도하는 것까지 다양한 항목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특별하고, 의미 있는 순간으로 채워 나가기 위한 계획이라는 점입니다. 이 리스트는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인 연결을 강화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깊게 만들어주는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2 연애 버킷리스트가 관계에 미치는 영향
연애 버킷리스트는 단순한 계획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꿈과 희망을 공유하며, 이를 함께 이뤄 나가는 과정에서 더욱 강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함께하는 활동은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줍니다. 예를 들어, 해외 여행을 가거나, 함께 한 장소에서 특별한 경험을 쌓는 일은 추억을 남기고, 시간이 지나도 그 순간들을 회상하며 다시 한 번 마음이 가까워지게 만듭니다.
성적 자신감 회복을 위한 노력
1 성적 자신감의 중요성
연애 관계에서 성적 자신감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건강한 성적 관계는 서로의 만족도를 높이고, 감정적인 유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성적 능력에 문제가 생기거나, 스트레스, 피로 등으로 성적 자신감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연애의 즐거움이 감소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적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은 건강한 연애를 지속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2 발기부전의 원인
발기부전은 남성에게 흔하게 발생하는 문제로,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과도한 음주, 불규칙한 생활습관 등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며,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발기부전이 나타날 확률이 높아집니다. 또한, 심리적 요인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적 능력에 대한 불안이나 자존감 저하 등이 발기부전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성적 자신감은 더욱 떨어지게 되고, 이는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레비트라와 성적 자신감 회복
1 레비트라의 효과
레비트라는 발기부전 치료제로, 성적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약물은 빠르게 효과를 나타내며, 복용 후 약 30분 내에 발기 기능을 개선시킵니다. 레비트라는 혈류를 원활하게 만들어 성적 자극에 대한 반응을 빠르게 일으키게 돕습니다. 또한, 효과가 4~5시간 동안 지속되므로, 연인과 함께하는 데이트나 특별한 순간을 보다 자유롭게 즐길 수 있습니다. 성적 기능이 회복되면, 그만큼 성적 자신감도 되찾게 되어, 관계의 질을 높이고 두 사람 사이의 유대감을 더욱 강화할 수 있습니다.
2 레비트라와 신체적, 심리적 건강
성적 자신감을 회복하려면 신체적인 건강과 심리적인 안정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레비트라는 발기부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규칙적인 운동, 균형 잡힌 식사, 그리고 스트레스 관리가 중요합니다. 건강한 생활습관은 레비트라와 함께 성적 능력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심리적인 요인도 중요한데, 연인과의 긍정적인 의사소통과 상호 이해가 성적 자신감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3 전문가의 조언
레비트라는 매우 효과적인 약물이지만, 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적절한 복용량을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비트라를 사용하기 전에 전문가와 상담을 통해 자신의 건강 상태에 맞는 사용법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전문가의 조언을 받으면 더욱 안전하게 약물을 사용할 수 있으며, 성적 능력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연애 버킷리스트 항목과 성적 자신감
1 여행과 새로운 경험
연애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두 사람이 함께 새로운 경험을 쌓는 것입니다. 해외 여행이나 특별한 여행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줍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은 성적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레비트라와 같은 약물을 사용하면, 여행 중에도 성적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으며, 두 사람 모두 만족스러운 성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2 스킨십과 감정의 교류
스킨십은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단순한 손 잡기나 포옹을 넘어, 서로의 신체적 반응을 자극하는 깊은 스킨십은 성적 자신감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레비트라는 이러한 스킨십을 더욱 자연스럽고 즐겁게 만듭니다. 성적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에, 더욱 만족스러운 성적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3 특별한 데이트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특별한 데이트를 계획하는 것도 연애 버킷리스트의 중요한 항목입니다. 예를 들어, 럭셔리한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식사나, 야경을 즐기며 걷는 데이트는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로맨틱하게 만들어줍니다. 이러한 특별한 순간에서 성적 자신감이 높아지면, 더욱 자유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결론
연애는 단순히 서로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함께 목표를 이루고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연애 버킷리스트는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특별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줄 수 있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성적 자신감이 떨어지면, 이러한 소중한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없지만, 레비트라와 같은 발기부전 치료제를 통해 성적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레비트라는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성적 문제를 해결하며,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연애의 즐거움과 만족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데, 건강한 생활 습관과 레비트라의 도움을 함께 받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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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no1reelsite.com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한교총이 발간한 선교사 전기 시리즈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980년 목원대 대학원 현판식에 참석한 찰스 스톡스(왼쪽 끝) 선교사. /한교총
“한국의 중심은 대전”...목원대 설립한 스톡스 선교사
대전 목원대를 설립한 감리교 선교사 찰스 스톡스(1915~1998)의 태도도 인상적입니다. 그는 왜 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바다이야기룰 “6·25동란 이후 목회자들이 납북되고 피해가 많았고 이후 여러 지역에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나섰으나 지도자가 없었어요. 감리교회 지도자 양성을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한국인은 서울에서만 공부하기 좋아하고 농촌에선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한국의 중심부인 대전에 농촌에서 일하고자 원하고 남을 섬기는 감리교 지도자 선교사 교육 사업가들을 육성 게임몰 하고픈 마음이 생겨났지요.”
‘한국의 중심부인 대전’ ‘농촌에서 일하고자 원하고 남을 섬기는 지도자’라는 표현이 눈에 띄더군요. 요즘으로 치면 지방 분권, 지방 균형 발전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설립 초기부터 대학에선 신학 외에도 농촌 계몽 활동을 위해 다양한 실업 교육, 즉 젖소와 염소를 키우는 낙농업, 과수원예농업, 양봉업 교육을 바다이야기하는법 했지요. 농촌 주민과 농촌 교회의 자립을 함께 염두에 둔 것입니다.
찰스 스톡스는 ‘한국 선교사 집안’ 출신입니다. 1907년 아버지 메리온 보이드 스톡스 선교사가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것이 시작이지요. 찰스의 형 3명은 개성, 원산에서 태어났고 찰스는 부모가 안식년으로 귀국함에 따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외가에서 태어났지 오션파라다이스예시 요. 이후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와 서울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애즈베리 대학을 나왔지요. 한국 선교사로 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1940년 7월 한국 선교사로 왔다가 10월에 일본의 압박으로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다시 한국에 와 6·25전쟁 와중에는 충북 음성에서 전쟁고아를 돌보는 향애원을 설립하고, 1953년부터 바다이야기룰 대전을 거점 삼아 전후 복구를 돕고 복음 사역을 시작한 분이지요.
“한국 선교를 위해선 언어, 관습, 사람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한국 침례교 개척자인 말콤 펜윅(1863~1935)은 “한국 선교를 위해 넘어야 할 세 가지 언덕이 있다. ‘언어의 언덕’ ‘관습의 언덕’ ‘사람의 언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선교사가 넘었던 언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교총이 펴낸 선교사 전기 시리즈 중 말콤 펜윅(왼쪽)과 오웬 선교사 전기의 표지. /한교총
광주광역시 오웬기념각으로 남은 의사 선교사 오웬
의사였던 클레멘트 오웬(1867~1909) 선교사는 지금도 광주광역시에 ‘오웬기념각’으로 남아 있는 분이지요. 1912년 완공됐으니 벌써 114년이나 된 오웬기념각은 지금도 주요 종교 문화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현역 문화 공간’입니다. 오웬은 원래 목포에서 사역했는데 그의 진료소를 찾는 이들이 교인이 돼 교회가 급성장 부흥했다고 하지요. 이후 광주에 목회자가 필요하게 되자 오웬은 목포를 떠나 광주로 옮겨 의사 역할보다는 목사로 활동했는데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망은 한센인 시설인 여수 애양원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사연입니다. 그가 급성 폐렴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또 다른 의사 선교사 포사이드가 급히 목포에서 광주로 오는 길에 한센병 여인을 만납니다. 포사이드는 그녀를 말에 태워 광주로 데리고 와서 돌보았지요. 그렇지만 결국 2주 만에 그녀도 사망합니다. 그냥 그렇게 끝낼 수도 있는 일이었지요. 그렇지만 포사이드와 선교사들은 아무도 거두지 않는 한센인들을 돌보기로 합니다. 광주 선교부에 병원과 구호소를 열자 소문을 들은 전국의 한센인들이 모여들었고 주민들과 마찰이 일어났지요. 선교사들은 당시로서는 인적이 드물던 여수에 한센인 시설을 만들기로 합니다. 애양원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애양원은 먼 훗날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6·25 순교자 손양원(1902~1950) 목사로 이어지지요.
홀 선교사 부부 수행하다 평양 감영 갇혀 구타당한 김창식 목사
한국인 김창식(1857~1929) 목사는 서양 선교사들의 믿음직한 동반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1894년 ‘평양 기독교인 박해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평양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서양인과 개신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1894년 홀 박사 부부와 함께 평양에 전도 여행을 온 김창식은 5월 10일 새벽 평안감사가 보낸 관헌에 체포돼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평양감사는 10만 냥을 내놓지 않으면 계속 때리겠다고 했고요. 이 사건은 금세 외교 문제로 비화했습니다. 홀 박사 부부는 서울의 영국 영사관과 미국 공사관에 전보를 쳤고, 양국 외교관은 조선 왕실에 항의하며 석방하라고 압력을 넣었지요. 결국 조선 왕실은 평안감사를 질책하는 전문을 보냈고 김창식은 5월 11일 오후 6시쯤 석방됐습니다.
한교총이 펴낸 선교사 전기 시리즈 중 '김창식'(왼쪽)편과 헨리 데이비스'편의 표지. /한교총
영국과 미국 공사관은 관련자 처벌과 배상을 요구했고 조선 측은 결국 영국과 미국 공사관에 500달러를 배상했다고 합니다. 당시 평안감사는 민병석이라는 사라으로, 명성황후의 친척이었답니다. 명성황후의 뒷배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지요. 결국 민병석은 이 사건 때문에 자리에서 쫓겨났답니다.
이 사건은 48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어진 일종의 해프닝이었지만 개신교 선교와 관련해 중요한 결과로 연결됐습니다. 평양 주민들 눈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평양감사보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더 힘이 센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이후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개신교가 부흥한 도시가 됐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 중 한 명인 길선주(1868~1935) 목사의 마지막 기도는 이렇습니다.
“저를 평안하게 놓아 주옵소서. 그러나 병석에서 죽지 아니하고 죽는 날까지 주의 말씀을 전하며 강단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하소서. 주님께 영광 되게 하소서.”
6개월 만에 사망한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조카들도 한국 선교
헨리 데이비스(1856~1890) 선교사는 호주 장로교 출신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1889년 10월 한국에 와서 6개월 만인 1890년 4월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서울을 떠나 선교지인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숨졌습니다. 무언가 업적을 남길 수가 없는 조건이었지요. 그렇지만 그는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호주 선교사들이 잇따라 한국 특히 부산과 경남 지역으로 찾아왔고, 20년 후에는 조카 마가릿과 진 자매가 부산, 진주를 찾아왔습니다. 조카들은 20~30년간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 귀국했지요. 자매 중 동생인 진은 멜버른대 의대에 시신을 기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데이비스는 우리의 어둠 속에 들어와 우리의 집을 방문하였고, 우리의 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어둠의 땅에서 씨앗으로 뿌려졌고, 한국을 위한 큰 빛과 생명으로 자랐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를 매장할 때 돕던 한 한국인은 이런 회고를 남겼다고 합니다.
선교사 전기 시리즈는 이들 외에도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6권) ‘남부 신사 윌리엄 전킨’(9권) ‘한국에 뿌리 내린 유화례 선교사의 선교와 삶’(11권)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자 존 로스’(12권) ‘한국 오순절의 초석을 놓은 메리 럼시’(14권) ‘한국 초기 기독교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15권) ‘알렌, 한국 교회의 둥지를 만들다’(17권) ‘호주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18권) ‘제임스 게일과 함께한 마지막 식사’(19권) ‘오순절 신앙으로 한국 복음화의 구심점이 된 체스넛 선교사’(20권) ‘복음을 따라 한국을 섬기다:선교사 호머 헐버트’(21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근대 선교사라고 하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만 알려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개신교 140년 역사엔 이렇게 많은 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음을 새삼 일깨워 주는 전기 시리즈입니다. 선교사 전기 시리즈는 비매품이지만 한국교회총연합 홈페이지(https://www.ucck.org/InfoMap/Series)에서 전자책 형태로 무료로 읽을 수 있습니다.
1980년 목원대 대학원 현판식에 참석한 찰스 스톡스(왼쪽 끝) 선교사. /한교총
“한국의 중심은 대전”...목원대 설립한 스톡스 선교사
대전 목원대를 설립한 감리교 선교사 찰스 스톡스(1915~1998)의 태도도 인상적입니다. 그는 왜 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바다이야기룰 “6·25동란 이후 목회자들이 납북되고 피해가 많았고 이후 여러 지역에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나섰으나 지도자가 없었어요. 감리교회 지도자 양성을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한국인은 서울에서만 공부하기 좋아하고 농촌에선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한국의 중심부인 대전에 농촌에서 일하고자 원하고 남을 섬기는 감리교 지도자 선교사 교육 사업가들을 육성 게임몰 하고픈 마음이 생겨났지요.”
‘한국의 중심부인 대전’ ‘농촌에서 일하고자 원하고 남을 섬기는 지도자’라는 표현이 눈에 띄더군요. 요즘으로 치면 지방 분권, 지방 균형 발전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설립 초기부터 대학에선 신학 외에도 농촌 계몽 활동을 위해 다양한 실업 교육, 즉 젖소와 염소를 키우는 낙농업, 과수원예농업, 양봉업 교육을 바다이야기하는법 했지요. 농촌 주민과 농촌 교회의 자립을 함께 염두에 둔 것입니다.
찰스 스톡스는 ‘한국 선교사 집안’ 출신입니다. 1907년 아버지 메리온 보이드 스톡스 선교사가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것이 시작이지요. 찰스의 형 3명은 개성, 원산에서 태어났고 찰스는 부모가 안식년으로 귀국함에 따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외가에서 태어났지 오션파라다이스예시 요. 이후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와 서울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애즈베리 대학을 나왔지요. 한국 선교사로 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1940년 7월 한국 선교사로 왔다가 10월에 일본의 압박으로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다시 한국에 와 6·25전쟁 와중에는 충북 음성에서 전쟁고아를 돌보는 향애원을 설립하고, 1953년부터 바다이야기룰 대전을 거점 삼아 전후 복구를 돕고 복음 사역을 시작한 분이지요.
“한국 선교를 위해선 언어, 관습, 사람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한국 침례교 개척자인 말콤 펜윅(1863~1935)은 “한국 선교를 위해 넘어야 할 세 가지 언덕이 있다. ‘언어의 언덕’ ‘관습의 언덕’ ‘사람의 언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선교사가 넘었던 언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교총이 펴낸 선교사 전기 시리즈 중 말콤 펜윅(왼쪽)과 오웬 선교사 전기의 표지. /한교총
광주광역시 오웬기념각으로 남은 의사 선교사 오웬
의사였던 클레멘트 오웬(1867~1909) 선교사는 지금도 광주광역시에 ‘오웬기념각’으로 남아 있는 분이지요. 1912년 완공됐으니 벌써 114년이나 된 오웬기념각은 지금도 주요 종교 문화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현역 문화 공간’입니다. 오웬은 원래 목포에서 사역했는데 그의 진료소를 찾는 이들이 교인이 돼 교회가 급성장 부흥했다고 하지요. 이후 광주에 목회자가 필요하게 되자 오웬은 목포를 떠나 광주로 옮겨 의사 역할보다는 목사로 활동했는데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망은 한센인 시설인 여수 애양원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사연입니다. 그가 급성 폐렴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또 다른 의사 선교사 포사이드가 급히 목포에서 광주로 오는 길에 한센병 여인을 만납니다. 포사이드는 그녀를 말에 태워 광주로 데리고 와서 돌보았지요. 그렇지만 결국 2주 만에 그녀도 사망합니다. 그냥 그렇게 끝낼 수도 있는 일이었지요. 그렇지만 포사이드와 선교사들은 아무도 거두지 않는 한센인들을 돌보기로 합니다. 광주 선교부에 병원과 구호소를 열자 소문을 들은 전국의 한센인들이 모여들었고 주민들과 마찰이 일어났지요. 선교사들은 당시로서는 인적이 드물던 여수에 한센인 시설을 만들기로 합니다. 애양원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애양원은 먼 훗날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6·25 순교자 손양원(1902~1950) 목사로 이어지지요.
홀 선교사 부부 수행하다 평양 감영 갇혀 구타당한 김창식 목사
한국인 김창식(1857~1929) 목사는 서양 선교사들의 믿음직한 동반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1894년 ‘평양 기독교인 박해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평양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서양인과 개신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1894년 홀 박사 부부와 함께 평양에 전도 여행을 온 김창식은 5월 10일 새벽 평안감사가 보낸 관헌에 체포돼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평양감사는 10만 냥을 내놓지 않으면 계속 때리겠다고 했고요. 이 사건은 금세 외교 문제로 비화했습니다. 홀 박사 부부는 서울의 영국 영사관과 미국 공사관에 전보를 쳤고, 양국 외교관은 조선 왕실에 항의하며 석방하라고 압력을 넣었지요. 결국 조선 왕실은 평안감사를 질책하는 전문을 보냈고 김창식은 5월 11일 오후 6시쯤 석방됐습니다.
한교총이 펴낸 선교사 전기 시리즈 중 '김창식'(왼쪽)편과 헨리 데이비스'편의 표지. /한교총
영국과 미국 공사관은 관련자 처벌과 배상을 요구했고 조선 측은 결국 영국과 미국 공사관에 500달러를 배상했다고 합니다. 당시 평안감사는 민병석이라는 사라으로, 명성황후의 친척이었답니다. 명성황후의 뒷배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지요. 결국 민병석은 이 사건 때문에 자리에서 쫓겨났답니다.
이 사건은 48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어진 일종의 해프닝이었지만 개신교 선교와 관련해 중요한 결과로 연결됐습니다. 평양 주민들 눈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평양감사보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더 힘이 센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이후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개신교가 부흥한 도시가 됐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 중 한 명인 길선주(1868~1935) 목사의 마지막 기도는 이렇습니다.
“저를 평안하게 놓아 주옵소서. 그러나 병석에서 죽지 아니하고 죽는 날까지 주의 말씀을 전하며 강단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하소서. 주님께 영광 되게 하소서.”
6개월 만에 사망한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조카들도 한국 선교
헨리 데이비스(1856~1890) 선교사는 호주 장로교 출신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1889년 10월 한국에 와서 6개월 만인 1890년 4월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서울을 떠나 선교지인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숨졌습니다. 무언가 업적을 남길 수가 없는 조건이었지요. 그렇지만 그는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호주 선교사들이 잇따라 한국 특히 부산과 경남 지역으로 찾아왔고, 20년 후에는 조카 마가릿과 진 자매가 부산, 진주를 찾아왔습니다. 조카들은 20~30년간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 귀국했지요. 자매 중 동생인 진은 멜버른대 의대에 시신을 기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데이비스는 우리의 어둠 속에 들어와 우리의 집을 방문하였고, 우리의 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어둠의 땅에서 씨앗으로 뿌려졌고, 한국을 위한 큰 빛과 생명으로 자랐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를 매장할 때 돕던 한 한국인은 이런 회고를 남겼다고 합니다.
선교사 전기 시리즈는 이들 외에도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6권) ‘남부 신사 윌리엄 전킨’(9권) ‘한국에 뿌리 내린 유화례 선교사의 선교와 삶’(11권)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자 존 로스’(12권) ‘한국 오순절의 초석을 놓은 메리 럼시’(14권) ‘한국 초기 기독교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15권) ‘알렌, 한국 교회의 둥지를 만들다’(17권) ‘호주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18권) ‘제임스 게일과 함께한 마지막 식사’(19권) ‘오순절 신앙으로 한국 복음화의 구심점이 된 체스넛 선교사’(20권) ‘복음을 따라 한국을 섬기다:선교사 호머 헐버트’(21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근대 선교사라고 하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만 알려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개신교 140년 역사엔 이렇게 많은 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음을 새삼 일깨워 주는 전기 시리즈입니다. 선교사 전기 시리즈는 비매품이지만 한국교회총연합 홈페이지(https://www.ucck.org/InfoMap/Series)에서 전자책 형태로 무료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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