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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초 소록도를 다녀왔습니다. ‘한국의 100년 교회를 가다’ 시리즈 취재를 위해서였지요. 현장 취재를 다니면서 절감하는 것은 제가 몰랐던 것이 너무나 많다는 점입니다. 소록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록도교회에 대해서는 5~6년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19년 소록도교회가 100년사를 펴낸 것이 계기였습니다. 소록도연합교회는 ‘소록도교회사-소록도교회가 걸어온 지난 100년간의 발자취’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100주년은 2022년이지만 미리 100년사를 편찬한 것이었죠. 당 카드모집인조회 시 개신교계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교회에 부탁해 100년사를 구해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소록도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감동했습니다.



소록도 2대 병원장인 하나이 젠키치(왼쪽)와 그의 공덕을 기려 환자들이 성금을 모 자동차 카드할부 아 세운 창덕비. /소록도연합교회, 김한수 기자


그중에서도 ‘선한 일본인’의 존재는 새로웠습니다. 작고 예쁜 섬 소록도를 한 바퀴 돌던 중 꽤 큰 비석이 서 있는 걸 보았습니다. 소록도에 한센인 격리 치료 시설로 처음 세워졌던 자혜의원이라는 병원 건물 앞이었습니다. 비석 앞면엔 큰 글자 한자로 ‘花 개인파산신청 井院長彰德碑(화정원장창덕비)’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창덕비’란 요즘은 잘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 ‘남의 아름다운 덕이나 어질고 착한 행실을 밝혀 적은 비’라는 뜻입니다. ‘표창장’이라고 할 때 그 밝을 창(彰) 자를 씁니다. 이 창덕비는 소록도병원 제2대 원장이었던 하나이 젠기치(花井善吉)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입니다. 안내를 해 준 분은 “저 비석은 해방 총부채상환비율 후에 없어질 뻔한 것을 환자들이 땅에 파묻어 숨겼다가 나중에 꺼내 다시 세운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비석 옆 설명판에는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해방 후 자유당 정권의 일제 잔재 말살 정책에 의해 비석이 폐기될 위기에 처하자 환자들이 몰래 땅에 묻었다가 1961년 5·16 이후에 다시 발굴하여 중앙공원 입구에 세웠으며 1988 전세보증보험 년에 원래 장소인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소록도의 자혜의원 터. /김한수 기자


좀 놀라웠습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선입견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는 악독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창덕비’라니요. 게다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단순히 ‘일본 사람’이라는 이유로 비석을 훼손할까 걱정해 파묻어 보존했다니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 역시 설명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환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원 초기부터 강요해 왔던 일본식 생활 양식을 폐지하였으며, 본가와의 통신이나 면회,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허용하였다.
환자 교육에 있어서도 3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고 독서를 장려하는 등 교육의 기회도 부여하였다. 또한 체육 활동을 위해 운동장을 조성하고 환자위안회를 조직하여 단조로운 수용 생활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 환자들로부터 인자한 원장으로 추앙받았다. 일본인이면서 한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내 가족처럼 아껴주고 인자하게 대해준 원장의 배려에 감동한 환자들이 직접 경비를 모금하여 이 비석을 세웠다.”



소록도에서 1922년 최초로 예배가 드려진 건물터. /김한수 기자


‘한센인들은 3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발병 사실을 알았을 때, 사망해서 부검(시신 해부)할 때 그리고 화장(매장이 일반적이던 당시)할 때라고 합니다. 이처럼 차별과 사회적 냉대 속에 살았지요. 100년 전이라면 사정은 더했겠지요. 그런데 하나이 원장은 같은 조선인에게도 차별받던 한센인을 차별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헤아려 베풀었던 사람입니다. 설명판에 ‘추앙’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요? 환자들은 진심으로 하나이 원장을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비용을 모아 공덕비를 세우려고 했지요. 하나이 원장은 그 소식을 듣고는 “공덕비를 세우면 나는 소록도를 떠나겠다”고 했답니다. 환자들은 할 수 없이 계획을 보류했고요. 그러다 1929년 하나이 원장이 병으로 별세합니다. 그때서야 환자들은 미뤘던 계획을 다시 이어 1930년 창덕비를 세우게 됩니다.
하나이 원장은 일본군 군의관 출신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중령급이었던 1921년 6월 만 5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소록도병원(자혜의원) 2대 원장으로 부임해서 1929년 사망할 때까지 원장으로 재직했습니다. 하나이 원장은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원장 부임 3개월 후에 부산, 대구, 광주의 나환자 요양소를 시찰했다고 합니다. 이곳들은 당시 개신교 의료 선교사들이 한센인 요양소를 만들어 환자들을 수용했던 곳입니다. 이 시설들을 둘러본 후 자혜의원 운영 방식을 바꿨다고 합니다. 그 이전 환자들은 일본식 복장을 갖춰야 했고 병의 상태와 관계없이 중앙배급식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이 원장은 복장도 한복을 입을 수 있도록 하고, 식사도 각 병사(病舍)에서 사정에 맞게 자취해 먹을 수 있도록 했으며 농지에서 보리나 채소를 경작하고 양계, 양돈도 허락하며 상당한 자율을 보장했다지요. 가족들과의 편지 왕래도 가능하게 했고요.
소록도에 교회를 세우도록 허용한 것도 하나이 원장입니다. 1922년 환자 세 사람이 섬을 탈출했다가 붙잡혔답니다. 하나이 원장이 심문한 결과 이들의 탈출 이유가 뜻밖이었답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어서 이 섬에서 못 살겠다”는 것이었다지요. 섬에 교회가 없어서 탈출했다는 얘기였습니다. 앞서 서양 선교사들이 광주, 대구, 부산 등지에 한센인 요양소를 세워 돌봤다고 말씀드렸지요. 소록도로 온 환자 가운데 상당수는 이들 요양소에 있던 분들이었답니다. 이미 서양 의료 선교사에게 개신교 세례를 받은 교인이 많았답니다. 그런데 소록도에는 당시에 교회도 없고 목회자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신앙에 의지해 병마, 차별, 냉대를 견뎌왔던 환자들로서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탈출할 만도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100년 전이라는 상황, 일본인 원장과 한국인 한센병 환자, 탈출 시도 후 체포 등등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본다면 다음 결과는? 아마도 구타나 징벌 등을 연상하게 되지요.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하나이 원장은 이들의 호소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일본인 성결교 다나카 신자부로(田中眞三郞) 목사를 초빙합니다. (아마도 하나이 원장은 종교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1922년 10월 전도 집회를 연 것이 소록도교회의 시작입니다.



소록도교회 한센인 교인들을 이끌었던 고이데(왼쪽 두번째) 목사와 야다 목사(왼쪽 세번째) 가족의 모습. /소록도연합교회


소록도교회 100년사에는 또 한 명의 선한 일본인이 등장합니다. 두 번째로 부임한 고이데 도모하루(小出朋治) 목사입니다. 다나카 신자부로 목사 후임으로 1926년 7월 부임하지요. 두 목회자 모두 일본 성결교단 소속이었습니다.
니가타 출신인 고이데 목사는 초등학교 졸업 후 도쿄로 상경해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간다복음전도관에서 대원들이 열심히 전도하는 모습에 감명받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지요. 1906년 도쿄성서학원을 졸업한 그는 고향에서 전도사로 경험을 쌓고 황해도 황주를 거쳐 소록도로 오게 됩니다. 1932년 고이데 목사가 소록도를 떠나기 전까지 하나이 원장과 고이데 목사는 협력해 소록도 환자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1927년 1월 고이데 목사의 사회로 공동의회를 개최했고, 그해 4월 17일에는 교회 설립 후 처음으로 부활주일을 지켰습니다. 11월 16일부터는 새벽기도회를 시작했고요. 소록도에는 전국에서 온 환자들도 늘었지만 교인도 늘고 교회도 부흥했습니다. 1928년 7월엔 북병사(구북리) 예배당 입당식을 가졌고, 남부병사(남생리)에도 예배당을 신축해 10월에 남부교회가 생겼습니다. 이때 병원 당국에서는 풍금, 시계와 종을 선물했다지요.
고이데 목사는 서울에서 목회하다 1937년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는데, 1942년 일본 왕을 신으로 섬겨야 한다는 지시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구속돼 태평양전쟁 직후인 1945년 9월 10일 일본 사카이 형무소에서 숨졌다고 합니다. 훗날 소록도교회 김두영 목사가 일본을 방문해 들은 바에 따르면 일본 형무소 간수에게 ‘민족 반역자’라며 구타당해 순교했다고 합니다.
고이데 목사에 이어 3대 야다 분이치로(失田文一郞) 목사가 부임합니다. 1936년까지 소록도교회 목사로 있었던 야다 목사 역시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전임 목회자들이 ‘순회 전도 목사’ 신분이었다면 야다 목사는 원목(園牧)이 없던 시절 “소록도를 신앙의 천국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간호장(看護長)’ 신분으로 부임했다고 합니다. 감리교 목사였던 그는 소록도교회를 성결교단도 감리교단도 아닌 독립교회로 만들어 ‘소록도 성결교회’에서 ‘소록도기독교’로 이름을 바꾸고 연합체를 구성해 오늘의 소록도연합교회의 기틀을 놓았습니다. 이후 소록도에는 동생리교회, 중앙리교회, 서생리교회, 장안리교회, 직원교회 등이 생겼습니다.



소록도병원 4대 원장 스오 원장의 동상을 참배하는 모습. 자신의 동상까지 세우며 '소록도의 황제'로 악행을 저지르던 스오 원장은 동상 앞에서 원생의 공격을 받아 숨졌다. /소록도연합교회


물론 소록도의 일본인이 선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악독한 일본인도 있었지요. 1933년 부임한 4대 원장 스오 마사스에(周防正季)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조선나협회 상무이사 출신인 스오 원장은 ‘소록도의 황제’였답니다. 그의 말이 곧 법이었고, 교인들의 금품을 몰수하고 배급 식량을 삭감하는 온갖 악행을 저질렀답니다. 심지어 환자들을 동원하고 금품을 착취해 자기 동상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창덕비를 세우려 해도 마다했던 하나이 원장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인간형이지요. 그는 소록도에 신사(神社)를 세우고 원생과 직원을 강제로 참배하도록 했답니다. 야다 목사는 신사 참배 방침을 거부하다가 1936년 사실상 강제로 쫓겨났다고 합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한 원생(환자)들도 구타와 감금당하는 일이 수시로 벌어졌고, 섬에서 쫓겨나기도 했답니다. 정달수 장로라는 분은 신사 참배를 강요하며 고문을 당하면서도 “고로시데 구다사이” 즉 “죽여 주시오”라고 버텨 끝내 퇴원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록도 황제’의 독재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1942년 6월 20일. 이날은 스오 원장 동상에 참배하는 ‘보은 감사의 날’이었답니다. 3000여 원생을 모아 동상에 절하게 한 다음 스오 원장이 훈시하려는 순간, 뒷줄에 있던 원생 한 명이 뛰어나와 고함을 지르며 원장의 흉부를 찔렀답니다. 그렇게 황제처럼 굴던 스오 원장은 자기가 만든 자신의 동상 앞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요. 이후로 일본 관리들의 조선인과 신앙에 대한 탄압은 극심해졌다고 합니다. 예배당 안에 가마니 공장을 만들고, 주일이면 강제 노동을 더 심하게 시켜서 예배를 못 드리게 했다고 합니다. 이런 신앙 탄압은 광복 때까지 이어졌고요.



소록도동성교회. /김한수 기자


소록도 방문에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한센인들의 노력이 덜 알려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록도 100년 역사에 훌륭한 분도 많고, 악독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100년을 이어온 것은 한센인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1964년 지은 소록도중앙교회는 ‘이 건물을 정말 한센인들이 직접 지었단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특이하게 흰색 타일로 외벽 전면을 장식한 건물은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지금은 주민이 줄어서 문을 닫은 교회들도 모두 아름다웠습니다. 건물뿐 아니라 섬의 모든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기 위해 한센인들이 흘린 피와 땀을 생각하니 숙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록도중앙교회에서 혼자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성도와 그의 성경. /김한수 기자


소록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중앙교회에 다시 들렀습니다. 예배당엔 한 70대 후반 남성이 혼자 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손가락 마디가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성경을 350번 정도 읽었다”며 “400독(讀)이 목표”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얼마나 읽고 또 읽었을까요. 그의 성경은 구절마다 밑줄이 그어져 있고, 메모지까지 빽빽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표지가 떨어져 나가기 일보 직전입니다. 오후 시간엔 혼자 교회에 나와 성경을 읽고 저녁 식사 후엔 일찍 잠들고 매일 새벽기도회에 출석한다고 했습니다.



소록도남성교회. 1963년 건축돼 주민과 신도의 감소로 2018년 폐쇄된 이 교회 건물은 소록도교회 100주년 기념관으로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다. /김한수 기자


이런 신앙이 소록도 100년을 이어온 힘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소록도연합교회는 내년 개관을 목표로 ‘100주년 기념관’ 개관을 준비 중입니다. 섬 곳곳엔 기념관을 위해 ‘소록도교회 성도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신앙 물품을 기증해 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100주년 기념관’이 소록도의 신앙 역사를 후대에 잘 전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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