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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탕에 물고기인지 새인지 모를, 그러나 생기를 가득 머금은 생명체가 꿈틀거린다. 물속에서 퍼덕이는 새일까, 하늘을 헤엄치는 물고기일까. 한지 위를 가로지른 단순한 선, 물과 불, 흙, 공기만을 사용한 듯한 원초적인 색으로 이뤄진 그림은 인간과 새와 물고기와 나뭇잎을 거칠게 자리바꿈해놓고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여긴 막힘도 경계도 없지, 오직 자유만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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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미술대학교 정교수가 됐던 재독 작가 노은님(1946∼2022·사진)의 그림들은 그렇게 어디서도 보지 못한 자유로운 형태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작고 3주기를 맞아 15일 서울 종로구 현대화랑에서 개막한 회고전 ‘빨간 새와 함께’에는 작가의 예술 세계가 절정을 맞이한 1980∼1990년대 대표작 20여 점을 소개한다. 어린이의 장난스러운 스케치 같기도, 서휴바이론 주식
툰 판화 같기도 한 그림들은 여백이 많지만, 비어있지 않다. 굵고 큰 동양 붓이 새겨낸 필치 하나하나엔 강한 에너지가 가득해, 작가가 왜 ‘생명의 화가’로 불렸는지, 노은님의 작품이 왜 ‘그림으로 그려진 시’ 혹은 ‘생명의 즉흥시’라 일컬어졌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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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1986년작 ‘두나무 잎사귀 사람들’. 한지에 혼합재료, 215x280cm. 현대화랑 제공


1970년대 말부터 이미 독일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한 작가는 1984년엔 백남준, 요제프 보이스 같은 거장들과 나란히 비엔날레에 참여할 만큼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흥미로운 건 그가 ‘파독 간호사애니메이션관련주
’ 출신이라는 점인데, 그의 재능이 발견된 곳도 근무하던 병원이었다. 낯선 땅에서 그는 일기 쓰듯 그림을 그렸고, 이를 우연히 발견한 간호장의 권유로 병원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후 노 작가는 함부르크 국립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50여 년을 전업 작가로 살았다. 1982년 독일 작가들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함부르크 예술 후원금을 받았고, 본 시립 펀드선택
쿤스트폰즈상을 수상했다. 2019년 독일 미헬슈타트 오덴발트미술관에는 그를 기리는 영구 전시관이 개설됐으며,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함부르크 문화재 성 요하니스교회에도 그가 작업한 스테인드글라스 480장이 설치됐다.



인간과 새가 한 몸을 이룬 형상을 표현한 1986년작 ‘빨간 새와 함께’. 전시 제목을 가져온 작품이다.


노 작가는 데뷔하자마자 일찌감치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를 당시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에게 “독일에 그림 잘 그리는 여자가 있다”며 귀띔해 준 이는 백남준이었다. 그러나 국내서 학교를 나오지 않은 데다가, 단 몇 년간의 간호일 이력이 강렬하게 인식되면서 정작 고국에선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지난 14일 현대화랑에서 만난 권준성 노은님 아카이브 관장은 “간호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독일로 간 노 작가는 일부러 자신은 간호보조원이었다고 밝힐 정도로 ‘파독 간호사’ 꼬리표를 떼고 싶어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노 작가의 양아들이자 후견인이기도 했던 권 관장은 “노 작가는 간호보조원, 여성, 동양인이라는 3가지 장벽을 모두 뚫고 인정받았으면서도, 늘 ‘내 고향은 예술’이라며 작업 이외의 것으로 규정되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고 회고했다.



노은님 작가의 ‘큰 물고기 하나’(1984), 한지에 혼합재료, 286x281cm. 현대화랑 제공


권 관장에 따르면, 노은님 아카이브가 소장한 작가의 작품은 1000여 점에 달한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아카이브에서 단 한 점도 출품하지 않았다. 20여 점이 모두 현대화랑 박 회장의 소장품으로 이뤄진 것. 우연인지 올해는 작가가 독일로 건너간 지 55년, 그리고 현대화랑이 탄생한 지 55년이다. 전시명으로 가져온 동명의 작품(‘빨간 새와 함께’)은 물론, ‘나무 가족’ ‘큰 물고기 하나’ ‘검은 고양이’ ‘두나무 잎사귀 사람들’ 등 작가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1982년 이후부터 교수로 임용된 1990년까지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특히 3m에 달하는 대형 작품이 대거 등장해 눈길을 끄는데, 그중 ‘큰 물고기 식구들’을 비롯한 대작 세 점을 전시 후 아카이브에 기증하기로 돼 있어 의미를 더한다.



노은님의 ‘검정 고양이’(1986). 종이에 아크릴릭, 181x233cm. 현대화랑 제공


전시에선 노 작가의 다큐멘터리 ‘내 짐은 내 날개다’(1989)도 상영된다. 자연의 신비와 힘을 좇으며 예술 세계를 확장해 나가던 작가의 한 시절이 담겼다. “내가 태어나고 죽는 것은 우연이기도 하고 법칙이기도 하다. 나는 자연의 일부다. 이것은 우연도 아니고 법칙도 아니다.” 인생과 예술의 역설을 논하는 작가의 말들이 입체적인 관람을 제공한다.
고독한 내면과 마주한 타국에서 그림을 발견하고, 인생의 숙제를 예술을 통해 열심히 풀어내려 했던 노 작가. 생전 노 작가는 “그 속에서 나를 태우고, 녹이고, 잊고, 들여다보았다”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전쟁터 병사처럼 싸울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뭘까. 전시장을 가득 채운 ‘기꺼운 고뇌’와 ‘즐거운 애씀’의 흔적들 속에서 떠오르는 그의 말은 이것. “오히려 풀밭에서 뛰노는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 전시는 내달 23일까지.
박동미 기자